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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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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의 봄"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열망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한다. 최규하 정부의 긴급조치 해제와 재야 인사 복권, 개헌 논의 등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학가에서는 학원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노동 운동 또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시국수습방안'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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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서울의 봄
주요 정보
기간1979년 10월 27일 ~ 1980년 5월 17일
장소대한민국
배경
발생 원인12.12 군사 반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민주화 열망
주요 사건
주요 사건10·26 사건 이후의 정치적 혼란
신군부의 등장과 권력 장악 시도
5.17 군사 쿠데타
계엄령 확대 및 민주화 운동 탄압
결과
결과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행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권력 장악
민주화 운동 세력 탄압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 증가
명칭
한국어서울의 봄
로마자 표기Seoul-ui bom
영어Seoul Spring
관련 사건 및 인물
관련 사건10·26 사건
12·12 군사 반란
5·17 내란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인물박정희
전두환
최규하

2. 정치 상황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제4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인 최규하 정부를 출범시켰다.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재야 인사들을 복권하며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시민사회 원로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고, 1980년 3월부터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 민주화 투쟁'이 시작되었다.

1980년 5월, 여야는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고,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2월 28일 시민권 회복 조치를 발표하여 김대중, 윤보선 등 반체제 인사들의 정치적 자유를 회복시켰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삼김”은 차기 대통령에 도전하며 정치 활동을 본격화했고,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2. 1. 신군부의 등장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중 제4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인 최규하 정부가 출범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하여 개헌 논의를 허용하고,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재야 인사들을 복권했다. 국민들은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윤보선 등 시민사회 원로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다.

1980년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은 '어용 교수 퇴진'을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3월 말까지 18개교에서 8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김옥길 문교부 장관은 어용한 교수들은 양심에 따라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른바 '학원 민주화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4월 9일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훈련에 반발했고, 서울대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4월 24일, 서울 14개 대학 361명의 교수들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주도적으로 참여한 교수들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해직되었다.

5월, 여야는 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5월 1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월 초부터 정권 장악을 위한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2] 1980년 5월 15일 오후 1시경 남대문에서 학생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고 전투경찰을 향해 돌진, 압사당하는 사고가 발생해 수명이 부상하고 1명의 경찰이 사망했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월 20일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하고 국보위를 설치해 군부 주도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2월 28일 시민권 회복 조치를 발표했고, 다음 날인 2월 29일 김대중,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반체제 인사들의 정치적 자유가 회복되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 야권 지도자이자 1971년 대통령 선거의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 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등 “삼김”이 차기 대통령에 도전하며 정치 활동을 본격화했고,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서울 시내 고층 빌딩에서 청와대를 향한 창문의 블라인드가 일제히 제거되었다.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는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치 개입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4월 14일,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중앙정보부 부장 대리에 취임하여 민주화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편, 학생 시위가 학교에서 거리로 확산되고, 탄광 노동자들의 사북 사건 등 노동 운동도 과격해지면서 사회 불안이 커졌다.

이러한 가운데 여야는 5월 12일5월 20일 임시 국회를 소집하여 10·26 사건 이후 계속된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삼김”도 민주화 추진에 공동 보조를 맞췄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군부는 5월 17일 오전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단호한 조치(계엄령 전국 확대)를 취하기로 결의하며 군의 정치 개입을 명확히 했다. 같은 날 밤 임시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전국 확대(그동안 제주도는 제외)를 결의했다. 이로써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전국의 대학은 휴교 조치되었다. 동시에 김대중을 계엄령 위반으로 체포하고, 이어 김종필, 이후락(전 중앙정보부 부장), 박종규(전 대통령 경호실 실장) 등 박정권의 주요 정치인들을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했다. 또한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지도부, 민주화 운동 중심 인물들도 체포되었다. 이로써 신군부 세력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며 5·18 민주화운동(서울의 봄)은 종식되었다.

3. 사회 운동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재야 인사들을 복권하는 등 민주화 분위기를 조성했다. 윤보선 등 시민사회 원로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여야는 5월 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5월 1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청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5월 초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2] 1980년 5월 15일, 남대문에서 학생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고 전투경찰을 향해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이를 빌미로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보위를 설치하여 군부 주도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2]

1980년 8월 18일에는 서울 서대문 사거리 고가도로 주변에서도 학생 시위대의 시위가 있었고,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강경 진압했다.[3]

4월에 들어서면서 신군부 세력의 권력 장악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학생들은 유신 세력 퇴진, 계엄령 철폐, 정부 주도 개헌 반대 등의 정치적 슬로건을 내걸고 거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여 5월 15일 서울역 시위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3. 1. 학원 민주화 운동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를 이룩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1980년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은 '어용 교수 퇴진'을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3월 말까지 18개 학교에서 8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김옥길 문교부 장관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이익을 위해 어용한 사람이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교수들은 양심에 따라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른바 '학원 민주화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4월 9일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이에 반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병영집체훈련 폐지 요구 시위가 확산되었다.

4월 24일, 서울 14개 대학 361명의 교수들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사학의 족벌체계 비판, 군사교육 개선, 재임용제도 철폐, 교수회의 기능 강화, 대학별 교수협의회 구성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성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교수들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해직되었다.[2]

각 대학에서는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학생회와 교수회가 부활하였고, 유신 체제 시절 해임 또는 제적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복권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는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토론회와 시위가 시작되었고, 3월 27일 조선대학교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으로 학내 시위가 확대되면서, 학내 언론의 자유, 친정부 교수 퇴진, 이사회 운영 개선 등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3. 2. 노동 운동

민주화의 물결과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활고가 맞물리면서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1980년 5월 17일까지 농성 및 시위 등의 노동쟁의는 987건에 달했고,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참여하여 전년(427건)을 크게 상회했다. 특히 같은 해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광에서 발생한 노동쟁의에서는 4000명이 넘는 광부와 그 가족들이 나흘 동안 사북읍 일대를 점거(사북사건)하여 무정부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4. 서울의 봄 종식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재야 인사들을 복권했다.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고, 윤보선 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다.

1980년 3월, 대학생들은 '어용 교수 퇴진'을 외치며 학원 민주화 투쟁을 시작했다. 4월 9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시작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은 서울대, 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4월 24일 서울 14개 대학 교수 361명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신군부 집권 후 해직되었다.

1980년 2월 28일, 최규하 대통령은 김대중, 윤보선 등 반체제 인사들의 시민권을 회복시켰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삼김)이 차기 대통령에 도전하며 정치 활동을 본격화했고,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정치 개입을 노골화했다.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 부장 대리 취임은 민주화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여야는 5월 12일 임시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기로 했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계엄령 전국 확대를 결의하고, 당일 밤 임시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은 휴교 조치되었으며, 김대중 등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이로써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함께 서울의 봄은 종식되었다.[2][3]

5. 서울의 봄을 다룬 작품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그리고 이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영화'''



'''드라마'''

5. 1. 영화

5. 2.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서울의봄 http://encykorea.aks[...]
[2] 뉴스 https://newslibrary.[...]
[3] 웹인용 [특별편]사십년된 비염도 치료하는 쌍두마차 알약모독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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